이토록 아름다운 당신만이….
-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박상영

예상대로 비행기가 늦게, 제멋대로 출발하지만 무탈하게 네팔로 향한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중국과 네팔의 경계쯤 되려나…온통 구겨진 산들이 저 아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떠나기 전 보았던 영화의 장면들이 자꾸 겹쳐진다.

절대적 관계, 절대적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계는 이해관계이고,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사랑은 조건부다. 처음 사랑은 두 사람에게로 향하겠지만, 곧 자식들에게 내어주고, 직장에 얽매이고, 권력과 타협하면서 상대와의 관계를 가늠하고 그에 걸맞는 헐겁고 속된 사랑을 당연하게 여긴다. 님에게 그 강을 건너지 말고, 예서 조금만 더 장난스럽게 소풍처럼 사랑하자던 아흔 여덟 할아버지와 여든 아홉 할머니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절대적이고 그 때문에 꿈결처럼 아름답다. 오직 당신만을 향한 사랑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말이다.
여섯 손주들을 위한 알록달록 이쁜 내복들을 구입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죽자, 할아버지의 추억들과 함께 그 내복들을 함께 태운다. 채 피어나지 못하고 먼저 죽어 가슴 속에 뭍어두었던 자식들을 위해 준비했던 옷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넋두리처럼 얘기한다. 우리 애들에게 이쁘고 따뜻한 옷 꼭 챙겨 입혀달라고, 곧 나도 당신 따라 가겠다고. 지나간 시간의 기억들은 곧잘 아득해지고 잊혀지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 보다. 머릿속 기억은 이내 희미해지지만, 가슴에 품은 기억들은 서늘하도록 생생한가보다.
낯선 두 사람이 70년 넘도록 함께 하면서, 12명의 자녀를 낳고 서로를 오래도록 지긋이 지켜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오직 두 사람의 존재만이 보이고, 그 외의 것들은 보이지 않을 때, 보여도 하찮게 여길 때, 비로소 가능한 관계가 아닐까? 그럼에도 일상의 그 하찮은 것들이 때때로 관계를 비틀고 힘겹게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생일상을 받는다. 여섯 자식이 피워낸 생명의 열매들이 시끌벅적 잔치를 벌이지만, 그 끝은 끝내 우울하다. 여동생이 큰 오빠에게 서운함을 숨기지 않고, 술이 거나한 오빠는 판을 깬다. 할머니는 죄인처럼 한없이 눈물을 쏟고, 할아버지는 넋 나간 영혼으로 먼 곳을 멍하니 바라만 본다. 그해 겨울을 할아버지는 넘기지 못하고, 고슴도치 자식들은 오열한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남편의 무덤 앞에서 눈보다 더 투명한 눈물을 쏟는 할머니의 미련은 무엇일까? 마당에 쏟아진 낙엽을 치우다 말고 낙엽을 뿌리며 장난치던 그이와, 집 텃밭에 핀 꽃을 꺾어 머리를 치장하고 이쁘다며 한참을 바라보던 그이와, 개울가 빨래터에서 물장난을 하며 히히덕거리던 그이가, 기억의 저편에서 한꺼번에 와락 달려 나와 할머니의 온 몸을 촉촉이 적신다.
할머니가 슬퍼하고 두려워한 것은 이별도, 죽음도 아닐 게다. 기억들, 가슴 속에 차곡차곡 담아두었던 기억들 때문일 게다. 그 가슴 속에는 돈과 권세와 명예로움 따위는 감히 얼씬도 못했을 게다. 오직 두 사람만이, 당신만이 가득했을 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슴 속 기억들을 질기고 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