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이야기 네 번째 – 축구로 본 독일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지난번 편지 이후 무려 5개월만이군요. 그 사이 한국에선 많은 일이 있었지요. 그런 탓도 있었고, 이번 학기 수업량이 만만치 않아서 글을 쓸 만한 시간을 내지 못했습니다. 아주 가끔 베를린 리포트 왜 안 보내주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이 계서서 변명 좀 해봤습니다.

오늘은 독일과 브라질의 월드컵 4강전이 있는 날입니다. 축구의 나라답게 이런 날이면, 사람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삼삼오오 모여 축구 응원하기에 바쁘지요. 독일팀 골이 한골 터질 때마다 여기저기서 폭죽을 터뜨리기 때문에, 저처럼 TV가 없더라도 스코어를 대략 알 수가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되었을 때도 폭죽이 몇 번 터지더군요)

독일의 애국심 논쟁

응원 문화는 한국이나 여기나 비슷합니다만, 이들에게 월드컵은 좀더 특별한 구석이 있습니다. 평소 거의 보기 힘들었던 독일국기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때가 바로 월드컵 기간입니다. 삼색국기(흑-적-황)가 새겨진 티셔츠와 망토는 기본이고, 자동차 양옆에 국기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 발코니 화단을 국기 색깔로 장식해놓은 할머니 등 많은 사람들이 독일에 대한 애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독일인으로서의 자부심’은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일종의 금기시되었던 감정이었습니다. 나치즘의 토대가 되었던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 때문이었죠.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독일 국가(國歌)는 잠시 폐지되었다가, 파시즘적 내용이 담겼다는 이유로 1, 2절은 금지된 채 3절만 인정되었습니다. 그나마도 가사를 외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2001년, 독일 사회를 뜨겁게 달군 ‘애국심 논쟁’이 벌어집니다. 보수당인 기민당의 사무총장 마이어는 “나는 독일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Ich bin stolz, ein Deutscher zu sein).”라고 말한 것이 논란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에 트리틴 환경부 장관(녹색당)이 ‘마이어는 스킨헤드의 정신상태를 가졌다.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발언은 인종주의자와 같은 타락한 멘탈리티에 기반한 것이다’라며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트리틴은 보수진영으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게 되지만, 거친 표현에 대해서만 사과하고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습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그를 옹호하고 나섰거든요.

자부심을 느끼지 못했던 독일인들

당시 라우 대통령(사민당)은 논쟁에 뛰어들며, “우리가 독일인이라는 데 대해 기쁘게 생각하거나 감사하게 생각할 수는 있어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부심이란 나 스스로가 성취한 것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애국자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민족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조국을 무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민족주의에 반대한다”며 사실상 마이어의 발언을 비판하는데 동참합니다. 이에 기민당 측에서 ‘조국에 대한 자부심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8천만 국민을 대표할 수 있겠나’라며 다시 대통령을 비난하면서 논쟁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당시 슈피겔지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압도적 다수가 라우 대통령과 트리틴 장관에게 손을 들어줬고, 트리틴은 계속해서 장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약 40퍼센트가 ‘독일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의견을 보였고, ‘자부심을 느낀다’는 의견은 그보다 10퍼센트 적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특히 젊은 층일수록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아마도 학교에 다니면서 나치즘의 어두운 과거사를 수없이 반복해서 배운 것이 큰 이유일 거라 생각됩니다. 가끔씩 학부모들이 ‘6학년 때 배운 나치 역사를, 7학년, 8학년, 9학년. 10학년…..매년 계속해서 배우고 또 배운다. 비중을 좀 줄이면 안 되나’라고 하소연을 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2006년 자국에서 개최된 월드컵을 기점으로 독일인들도 조금씩 기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의 멍에를 벗고 부담 없이 애국심을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변화를 여전히 경계하는 시선도 존재하지만, ‘순수한 애국심이라면 사회통합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한국 축구는 늘 애국심과 같은 민족주의적 감정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재미없는 독일의 축구 중계

TV 해설만 봐도 그렇습니다. 객관적 해설보다는 일방적 응원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냅니다. 선수들의 실수를 반복해서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러다보면 그 경기에서 부진했던 한 두 선수는 ‘역적’이 되고 맙니다. 반면 독일 축구 중계를 듣고 있으면,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해설자들은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대체로 공을 소유하고 있는 선수 이름을 알려주면서 필요한 해설만 합니다. 기본 정보만 제공하고 시청자가 알아서 즐기라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 브라질이 독일을 5대0으로 앞서는 상황에서 전반전이 끝났는데요, 중간 휴식 타임에 어김없이 10시 뉴스를 보도합니다. 게다가 첫 뉴스는 월드컵 소식이 아닌, 팔레스타인 분쟁에 관한 뉴스입니다. 국내 뉴스에 이어, 날씨 보도까지 마치고 후반전 중계로 들어갑니다. 광고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독일 지상파 방송사 두 회사가 FIFA로부터 중계권을 사왔지만, 서로 번갈아 가며 중계를 합니다. 우리처럼 한 경기를 MBC, SBS, KBS 모두 생중계하는 장면은 없습니다.(아마 전세계에서 가장 낭비적인 중계권 쟁탈 경쟁이 아닐까 합니다만) 어찌보면 이들의 합리주의 전통에선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독일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월드컵 이전부터 언론 보도가 상당히 비관적이었다는 겁니다. (늘 그렇다는 식으로 얘길 하더군요) 심지어 16강에도 못 올라갈 것이라는 의견도 꽤 있었다고 하더군요. 기대치를 최대한 끌어올려서 붐을 조성하려는 우리 언론과는 정반대의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외국 선수들

지금 한국에선 박주영과 홍명보 감독이 동네북이 되었더군요. 온갖 화살이 쏟아지고 조롱섞인 패러디가 난무하는 걸 저도 봤습니다. 하지만 경기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전술은 둘째 치고, 우선 선수 개개인의 기량 차이가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은 늘 기적을 바라는 것인지, 미리부터 높은 목표를 주문하고 결과에 따라 반응이 달라집니다.

예전에 이청용 선수가 프리미어리그에서의 경험을 얘기하던 기사가 기억이 납니다. 선수들이 경기장 안에서는 온 힘을 다해 승리를 위해 뛰지만, 지더라도 락커룸에만 들어가면 결과에 상관없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다고 하더군요. 그런 모습은 이청용 선수가 자라온 환경에선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이겠죠. 그런 이청용 선수도 종종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과격한 태클을 구사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군요. 작년 가을, 한국팀이 브라질과 평가전에서 2대0으로 졌을 때에도 이청용 선수가 상당히 위험한 태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경기 후에 브라질 스콜라리 감독이 이런 말을 했죠. “브라질은 축구 자체를 했고, 한국은 너무 잘하려고만 했다.” 단지 축구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아 왠지 기분이 찜찜했습니다.

지금부터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축구 강국, 독일의 숨겨진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아, 방금 독일이 7대1로 이겼네요. 오늘 밤 일찍 자기는 틀렸습니다. 난리도 아니네요.)

독일 스포츠의 근간, ‘스포츠 클럽’

독일에는 무려 3만 3천개의 축구팀이 정식으로 등록되어 활동 중입니다. 전체 6부 리그로 나뉘어 있는데, 연방(전국) 단위 프로리그는 3부 리그까지 있고, 나머지 3개 리그는 지역리그(약 2천개의 지역 하위리그로 다시 나뉨)입니다. 하지만 모든 리그에 승강제도(꼴찌에서 몇팀이 하위리그로 올라가고, 반대로 잘하는 팀이 상위리그로 올라가는 제도)가 적용되기 때문에, 이론상 최하위 동네 축구팀도 분데스리가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에 재능이 있는 우수선수들은 학교가 아니라 이런 ‘스포츠 클럽’을 통해 자연스럽게 걸러집니다. 독일 학교에는 운동부가 없습니다. 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 두 개 이상의 스포츠 클럽에 소속되어 방과후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한국에선 학교 운동부에 소속되어야만 전국 단위 대회에 나갈 수 있고, 실력을 증명할 기회가 생깁니다.(정확히 말하면 대학이나 프로팀에 갈 기회가 주어지지요) 하지만 학교 운동부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공부를 일정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되므로, 본인은 물론 부모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되는 결정입니다. (실제로 한 자녀가 많아진 요즘, 학교 운동부 유지하기가 어려워진지 오래라고 하지요) 잘 되면 대박이지만, 대부분은 운동을 그만둔 후 진로가 막막해지는 문제에 부딪히고 맙니다.

국가는 간섭하지 않고 지원만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 정책’의 문제점은 오랜 세월 지적받아왔지만 별로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독일과 비교해보면 핵심은 국가의 역할에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는, 결과(성적)를 만들어내기 위한 프로젝트식 접근으로 국가가 지나치게 스포츠를 관리해오면서, 각종 운동종목 협회들은 비리와 부조리의 온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독일의 경우, 7인 이상만 모이면 세제혜택 등을 포함한 법적 보호를 받는 ‘스포츠 클럽’을 결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재 이런 스포츠 클럽이 9만개가 활동중이고,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가입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좋은 시설에서 운동을 즐길 수 있는 이점 때문에 만족도도 높다고 하구요. 정책(생활체육)을 사회적으로 합의해나가는 것, 그리고 그것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이 국가의 주된 역할입니다.

태릉선수촌과 같은 중앙집촌식 훈련장은 사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시스템입니다. 그 안에서 선수들이 굵은 땀을 흘려가며 만들어낸 메달 중에는 ‘우생순’ 같은 기적도 있긴 합니다. 그런데 ‘한데볼’이란 말이 유행했듯이, 올림픽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죠. 어떤 이들은 그런 미안한 감정을 자극하며, ‘비인기 종목에도 관심을!’ 호소하거나, ‘K-리그’의 팬이 되어줄 것을 읍소(!)하기도 합니다. 뭐, 필요하긴 합니다만…아니, 왜 한국에서는 스포츠가 하는 것(Playing)이 아닌 관람(Watching)이나 응원(Supporting)이 되어버렸을까요.

잘 되면 영웅, 못 되면 역적

스포츠 보도 또한 전투적인 언어로 넘쳐나는 것도 문제입니다. 국가 대항전만 되면, 언론들은 ‘태극전사’가 보내올 ‘승전보’를 기다리는 전시 보도로 태세가 바뀝니다. 국가‘대표’란 말도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용어라고 하죠 (영어로는 national team). 자신이 좋아서 야구를 하든, 피겨 스케이팅을 하든, 일단 국가대표가 되면 연애도 아무나(?) 해서도 안 되고, 성적이 안 좋으면 웃는 얼굴로 공항에 들어와서도 안 되는가 봅니다. 깊이 있는 분석 기사는 별로 없고, 성적 위주의 결과론적 분석만 넘쳐납니다. 잘되면 영웅(국민 사위, 국민 여동생)이요, 못 되면 역적입니다.

선진국이란 어떤 사회일까, 좋은 사회란 어떤 곳일까를 생각해봅니다. 바로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해보니 몇 가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주인은 없고, 객만 넘쳐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자는 설 자리가 없어지는데 소비자만 넘쳐나는 사회 일수도 있고, 관람객은 넘쳐나지만 예술가는 점점 가난해지는 사회일 수도 있을 겁니다. 여기서 함정은 우리가 사실 모두 노동자이면서, 소비자이자, 예술가이면서 또 감상하는 사람이라는 점이겠죠. 극소수에게만 자리가 허용되는 대박의 판타지를 갈망하며(갈망하도록 부추김당하며), 불행한 현실을 잠시나마 도피하려 하지만, 결국은 대다수가 불행해지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팬이 아니라 선수층이 두터워야

축구로 이야기를 풀어봤지만, 이것이 단지 스포츠만의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좀 비약해봤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특강에서 들었던 내용인데, 독일 국회의원 중 많은 수가 노조 지도자 출신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현장에서 경영자와 협상 해가며 검증되고 훈련된 리더십들이 자연스럽게 정치권에 유입된다고 합니다. 마치 독일 축구의 탄탄한 선수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 국회의원의 대다수는 정치 경력과 무관한 법조인들과 교수들이지요.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도 예능 프로에 출연해 하루아침에 대권주자가 될 수 있는(또 하루아침에 실망의 아이콘이 될 수도 있는) 불안정한 구조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취약한 구조를 튼튼히 할 장기플랜은 내놓지 않고, 고작 하는 것이 당 이름을 바꾸거나, ‘참신한’ 인물을 발굴해서 지역에 내리꽂는 일이나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축구로 엿본 독일, 그에 비춰본 한국이었습니다. 많이 확인하는 편이지만, 부정확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이 한국사회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생각의 단초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대만족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2014. 7. 9. 베를린에서 정 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