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지켜가는 일

한승희

  영화는 주인공 헨리가 에드가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의 한 구절을 학생들에게 읽어주며 끝난다. 충격적인 장면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잠깐 동안 멍하게 만들었던 장면은 “구역질나는 마음의 냉정함”이라 말하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주인공의 눈빛이었다. 피할 수 없는 눈빛, 피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정직하게 슬픔과 절망을 느껴내는 눈빛을 처음 본다.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 귀찮고, 한편으로는 힘들어서 대충 외면하고 망각하며 무지하게 살아온 나로서는 정면으로 마주하기 힘든 눈이었다.

  포스터에는 교육 영화라고 써 있지만, 이 영화는 그동안 나왔던 교육 영화와는 좀 다르다. 사회 안에 ‘교육’이라는 특정한 영역이 있고, 그 안에만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어떤 ‘이미지’를 그려냈던 기존의 교육 영화들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내가 당연하게 믿고 있던 근본적인 개념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사회 안에 ‘교육’이라는 특정한 영역이 다른 영역과는 구분되어 학교에서 별도로 운영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학교 제도’ 안에서 만들어진 ‘교사’라는 특정한 직업은 인간이 쌓아온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그런 역할을 ‘교육’이라는 분야로 분업하여, 특정 직업만이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 영화의 시선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학교니까, 교장이니까, 교사니까, 학생이니까’ 식의 당위는 부여하지 않는다. 마치 학교의 문제를 파헤치는 영화 같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원인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학교 교육 제도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학교를 탓하지도 않고, 학교이므로 어때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좋은 교육이라는 이상적인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냥 사람들이 학교 안에서 부딪치는 충돌, 참을 수 없는 감정의 폭발, 약물이나 술에 의지하고 마는 나약함,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문제, 외로움, 어린 시절의 상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과장된 폭력, 무관심, 자기 학대……. 그리고 그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살아남으려 노력하는 각자의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방식은 역시 주인공 헨리이다. 그는 문제아들만 모여 있는 영화 속 학교의 어느 학생과 비교해도 못지않을 정도의 상처를 갖고 있는 교사이다. 어떤 학생이 “당신이 힘든 인생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라고 대든다면, 아무렇지 않게 욕을 하며 그 따위를 힘든 인생 경험이라고 할 거라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고 할 것 같다. 그래서 영화 속 어떤 인물보다도 삶의 본질 중 하나인 ‘슬픔’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견딜 줄 안다. 감정에 지지도 않고, 감정으로 허세를 부리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낄 줄 안다. 온갖 말로 학생을 설득하지 않아도, 학생들은 그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그의 삶을 읽는다.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는 학생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어느 학교든, 한두 달 정도만 근무하는 임시 교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누구를 만나든 최선을 다해 수업을 한다. 수업 방식도 특별하지 않다. ‘고전 문학’을 가르치는 그의 수업은 어떻게 보면 좀 단조롭고 따분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말을 전달하는 그의 에너지, 그리고 진실성에서 학생들과 관객들은 그의 말에 집중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이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들은 대로 옮겨 본다. 

  “여자들은 사랑받고, 예뻐지기 위해 성형을 해야 한다. 살을 빼야 한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걸레, 창녀라고 욕을 하지. 이 모든 것이 진실일까? 모두가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마케팅을 위한 거짓이다. 우리는 거짓을 진실로 믿지 않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배워야 한다. 상상력, 인식 능력을 키우는 연습을 해야 한다.”

  배워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간결하게, 강렬하게 알려주는 어른이 그 학교에 있었을까? 대부분의 교사들은 자기의 삶도 어쩌지 못하면서 겨우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에 헨리가 학교를 떠나는 날, 한 흑인 학생이 ‘다른 선생님들은 다 멍청해요. 선생님이 무척 그리울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먹먹했다. 나도 그 ‘다른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그런 헨리임에도, 그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또 말한다.

  “우리는 실패했어요.”

  날카로우면서도 담담한 고백이다. 그가 말하는 실패는 좌절과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서 있는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최대한 정확하게 진단하는 말이다. 그래서 아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는 무엇에 실패하고 있을까. 다시, 처음에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과연 ‘교육’이라는 영역이 사회의 한 부분으로 분리되어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맞는 건가? 그 과업을 ‘교사’라는 특정 직업인만이 맡아 수행해낼 수 있는 건가? 우리는 스스로 불필요한 제도를 만들어내어, 그 안에 불필요하게 돈을 쏟아 붓도록 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고 있으면서, 자신이 학생들을 좋은 삶으로 이끌어주는 좋은 교사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를 실패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영화로 가 보자. 영화에서 주목하는 관계는 학교 안의 교사-학생이 아니다. 어느 날 예기치 못하게 부딪치게 된 길거리 성매매 소녀 에리카와 헨리의 관계이다. 잘못 읽으면, 10대 비행청소년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좋은 교사의 삶으로 읽힐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가 말하는 것은 그냥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 길거리에서 돈을 받고 성행위를 해주는 에리카는 헨리를 만나게 되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되찾는다. 헨리는 에리카의 몸의 상처를, 에리카는 헨리의 과거의 상처를 보듬으면서 의도치 않게 서로를 구원하게 된다. 무심한 세상 속에서 자기를 버려두며 살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지면서 삶의 동료를 얻게 된다. 그 우정이 이후에 남녀 간의 사랑으로 변하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는 그런 것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관계가 무엇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 무엇인가. 그것만을 스스로에게 묻게 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름의 대안으로 보여주는 관계도 학교 안에서의 관계가 아니다. 이 점이 이 영화의 가장 좋은 점이다. 문제는 학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제도도 아니다. 학교든 제도든 그것은 언젠가부터 누군가가 만들어 온 우리 삶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 삶의 문제의 원인이 그 곳에 있을 리 없다. 따라서, 아무리 학교의 시설과 제도를 바꾼들 우리의 삶이 달라질 리도 없다.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얼마나 외롭든, 어떻게 살 것인가. 애드리언 브로디의 눈빛은 묻는다. 그 눈빛을 본 사람은 누구든 얼마간 괴로울 것이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망각하지 않고 지속하는 만큼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