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편지 (2014.4.18)

며칠 전 자전거를 타고 석수역 근처를 지나는데 밤이었고 귀가길 이었습니다. 석수역은 서울-안양의 경계이고 자전거 도로가 없으며 차들이 무척이나 빨리 달립니다. 그날은 교차로를 지나다가 내가 어는 차의 흐름을 방해했나 봅니다. 내 옆으로 SUV가 한 대 속도를 늦추면서 창을 열었습니다. 그리곤 내게 “야이 씨발 새끼야!”라고 욕을 했어요. 그리고 나를 화난 얼굴로 째려보더니 창을 닫고 씽~하고 가벼렸습니다. 나는 내게 욕을 한 그 차의 뒤를 잠시 쳐다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화가 났나봅니다. 아마도 내가 그 사람 차의 진로를 방해한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욕을 하면 분이 풀릴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옛 사진을 보고 미소가 나오면 사진이 기분 좋은 게 아니라, 내가 기분 좋은 겁니다. 종이가 걸린 복사기를 대하며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면 복사기가 기분 나쁜 게 아니라, 내가 기분 나쁜 겁니다.

그리고 격렬한 분노는 속이 시원해지기 보다는 본인의 감정을 해칠 때가 많아요. 그럼, 욕을 먹을 때 내 감정은 어찌하나? 욕을 먹고 기분 좋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보통은 당사자도 화가 나지요. 그럴 때는 화난 감정을 재빨리 흘려보내는 게 좋습니다. 저는 그럴 때 제 감정에다 작별 인사를 합니다. 등을 토닥이듯 하며 나지막히 “안녕, 잘가라…잘가” 이렇게요.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화와(Hawwah는 히브리어에서 온 말이고, Eve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으로 같은 말입니다.)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생긴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뭔지는 모르지만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거죠. 그게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창 3:7)라는 말에 나와 있어요. 즉 열매를 먹기 전이나 후에 그들에게 fact가 변한 것은 없어요. 단지 ‘수치심’이 들어왔어요. 다른 말로 good과 bad가 들어 왔어요. 기독교는 이 사건을 원죄라 부르지만(원죄, original sin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어요. 그냥 교리죠.) 사실은 윤리, 도덕관념 같은 것이 들어온 것입니다. 단지 그들의 생각이 변한 거죠. 이때부터 인간은 도덕, 윤리, 수치심, 부끄러움 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시 말해 아담과 이브는 벗은 것을 벗었다고 바라보지 못하고(있는 그대로), 그것을 부끄럽다고, 다른 말로 나쁘다고 보기 시작한 겁니다. 이게 죄인가요?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벗은 것’을 ‘벗은 것’으로 보지 않고 ‘판단’을 하면서 인간사회가 복잡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판단 이전에는 fact가 있는데 이제 아담과 하와가 눈을 뜨면서 fact를 못 봐 버리니 아이러니네요.

Judas kiss(유다의 입맞춤). 예수의 12제자 중 한명인 가룟 유다가 스승을 팔아넘길 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들에게,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으시오.”(마26:48)라고 하면서, “안녕하십니까? 선생님!”(마26:49)이라며 예수께 입을 맞추지요. 여기서 ‘친절을 가장한 위선의 키스, 가식의 호의, 배신행위’라는 뜻이 나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