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나라에서 부친 망채의 편지

기억 : 2014년 2월 2일(일)~8일(토) 필리핀 답사

사람 : 전성표, 임지은, 이미숙, 박상영

길   : 인천공항-마닐라-Banaue-Sagada-Bagio-앙헬레스-피나투보화산-마닐라-인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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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답사여행의 백미는 단연 사가다 동굴트레킹이었다. 3시간 반 동안 동네청년 날라리 같은 프로가이드가 이끄는 등불 하나에만 의지하여 그야말로 온몸으로 동굴을 헤맸다. 수 만년 동안 지켜온 동굴의 침묵이 되어야 했고, 동굴의 몸들을 더듬거리며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아주 오래된 어둠의 바위 틈에서 바동거렸다. 무기력한 방관자가 아니라 체험하는 나그네는 행복했다.

사가다에서 바기오로 향하는 로컬버스를 타기 전, 정류장 뒤편 작고 소박한 성당을 들렸다. 문득 경이로웠고 충격이었다. 나무로 형상화된 예수상의 얼굴은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저 필리핀의 평범한 얼굴이었다. 인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들로 쌓여진 재단 위에서 고통스레 일그러지지 않은 채 편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필리핀에 가면 필리핀 식을 따르라! 새삼스럽다. 장거리 버스 예약도, 티켓팅도 따로 없다. 머리로 만나지 말고, 몸으로 부딪쳐라. 필리핀이 위험한 게 아니다. 자기 문화중심으로 고정된 내 자신의 경직됨이 매우 위태로울 뿐이다.

2014 셋넷여행자의 노래

첫째, 체력이다. 어딜 가든, 무얼 보든, 어떤 음식을 먹든 강력한 몸을 준비해야 한다. 원하는 곳을 향하는 길은 고단하다. 열악한 차량과, 더 열악한 도로에서 지쳐 자다가 목적지에 다다르면 낯선 곳을 만나기보다는, 신기한 곳을 접하게 된다. 신기함이란 관찰의 잣대를 주지만, 낯섬은 공감의 마음과 시선을 선사한다. 여행의 감동이란 그렇게 한 밤중 손님처럼 온다. 낯선 곳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길 위에서 잠들지 마라. 그 곳을 향한 길 위의 풍경들이란, 낯선 곳을 감싸고 있는 두툼한 옷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몸을 치장하고 보호하기 위해 공들인 시간과 문화의 자국을 보고 애씀을 이해할 때 비로소, 공감과 감동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

둘째, 유연성이다. 세상의 수많은 여행 책들이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떠나게 한다. 허나, 책은 책일 뿐이다. 남은 남일 뿐이듯, 참고서는 그저 참고하라는 친절과 우정을 담은 책이다. 참된 여행은 책을 넘어서야 보인다. 책을 향해 가고, 책을 확인하고, 책을 종착역으로 삼는 여행은 답답하고 허전하다. 왜냐고? 그 길에는 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함께 떠나지 않는 그 어떤 여행도 여행이라 할 수 없다. 여행사 가이드의 깃발에 안도하고, 여행 책의 충실한 수제자가 되어 흐뭇해하는 떠남은 항구에 묶여있는 배가 그저 바람과 파도에 찰랑거리며 잠시 멀미를 일게 하는 환상이요 환각이다.

여행 책과 우정의 유대감을 갖되, 우정을 깨기 위한 용기와 긴장과 홀로됨을 기억해라. 낯선 곳에는 내가 기억하고 학습된 길보다 상상할 수 없이 열린 길들이 널려있다. 그 엉뚱한 길들이 갇혀있는 내 영혼을 위로할 것이요, 그 상큼 발칙한 사람들이 고요 있던 내 몸을 요동치게 한다. 숨 막히도록 긴장하고, 당황하게 하는 불편한 문화의 방식들이 문명의 이름으로 비루해진 몸과 감각들에게 참된 자유를 맛보게 한다. 어찌 떠나지 않을 수 있을까?

셋째, 소통역량이다. 꽃은 매혹적이나 너무도 짧다. 꽃으로 향하는 줄기와 잎들과 열매는 느릿느릿 수더분하다. 여행과 일상의 관계도 이와 같다. 오직 여행을 위해 일상에 복무하거나, 여행을 일상과 무관하게 분리시키는 어리석음은 꽃의 생성과정을 거부하는 헛됨일 뿐이다. 줄기의 기도와 잎들의 바람과 열매의 간절함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순간의 꽃을 창조하듯이, 일상과 여행의 분열된 관계를 회복하라. 우리 행복이란 조각나 있지 않고, 편식으로 멍들지 않는다. 통합된 시간과 공간이 우릴 진정 행복케 하리니….

셋넷이 아시아 섬나라에서 꾸는 꿈은….

한반도의 상황은 늘 긴박했다. 그 생존의 도가니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과 살아남으려는 자들이 핏발선 동자로 일상을 노려본다. 대지를 어머니로 섬기던 아메리카인디언들은 달리던 말을 잠시 멈추게 하여 미쳐 뒤쫓아오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기다린다는데, 우릴 태운 이념의 말들은 도무지 쉬지 않는다. 그래서 한반도에 서식하는 인디언들의 영혼은 참을 수 없이 가볍다. 이들은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고 스스로를 현실에 가둔 채 사는 법을 터득했다.

이제 새로운 삶의 문법을 요청하며 한반도의 분단질서를 온통 뒤흔들 역사적 사건이 꿈틀거린다. 다문화와 통일이라는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이 다시금 한반도의 인디언들을 긴장시킨다. 다시금 시작하는 셋넷의 새로운 10년은, 영혼 없이 떠돌며 가볍지 않다. 고작 가문의 영광을 위한 사적 이익에 복무하지 않는 유연한 젊은 리더쉽을 훈련한다. 한반도 너머 아시아의 섬나라에서 펼치려는 셋넷의 새로운 10년은, 두려움을 뚫고 상상하는 발칙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통일이라는 미래의 과제를 고민한다. 고작 한반도에 갇힌 낡은 이념적 사고의 틀을 깨고, 아시아를 향한 평화의 연대망을 직조하는 세계시민의식과 네트워크역량을 채워간다.

셋넷 사이에 사람들의 섬이 있다. 그 섬, 사람들의 마을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