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만난 아이들

- [김중미 장편소설, 거대한 뿌리] [하이타니 겐지로 장편소설, 모래밭 아이들] [셋넷학교 편저, 꽃이 펴야 봄이 온다]

 

박상영

 

 

“요즘 그때 생각이 가끔 나. 나는 이뻤고, 당신은 멋졌고, 우린 아름다웠지.”(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극중 대사)

 

셋넷학교를 벌판에 대책 없이 세운 지 10년 만에 또다시 대책 없이 원주로 학교를 옮겼다. 누군가는 학교 문 닫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귀농학교로 업종을 변경했다고 수군거렸다. 학교운영에 절실했던 공적 지원도 끊어지고, 살가웠던 아이들도 하나둘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그 와중에 마주한 원주에서의 첫 검정고시는 10년 동안 치러온 연례행사였지만 낯선 긴장 속에 나를 가두었다. 도전한 셋넷전사 모두 합격한 쾌거에 마음을 쓸어내리고, 느릿한 기차에 갈라진 몸을 싣고 천년고도 경주 남산기슭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아이들을 만났다.

 

1970년대 중반의 동두천, 미 2사단 주변 기지촌, 경원선 철길가 판잣집들, 보산리 골목골목에서 잡초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었다. 해자, 경숙이, 재민이, 정원이. 슬프고 가슴 저미는 그 아이들의 아빠는 미군부대 군무원이었고, 미군들을 상대하는 양색시들 빨래해주는 엄마였다. 포주 삼촌과 미제 중독증에 빠진 언니들이 그들의 가족이었다. 아이들은 한국을 도우러 왔다는 점령군들을 상대로 질긴 삶을 연명해야만 하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산동네에서 화초처럼 자랐다. 그들이 꾸는 꿈이란 고작 미국으로 입양가거나, 결혼을 미끼로 귀환하는 병사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어디로든 떠나지 못하는 서로를 가엾게 여기며, 이미 애어른이 되어가는 거였다.(거대한 뿌리)

 

내가 만난 두 번째 아이들은 닫힌 교사들과 죽은 규칙들로 서서히 질식해 가고 있었다.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학생 자립의 길’을 가기 위해 복장과 두발, 소지품과 소소한 일상까지 죄수처럼 통제 받는 3학년 C반 아이들은, 무기력하게 반항하고 숨 죽여 세상과의 소통을 멈춰간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되니까,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건 어쩐지 쓸쓸하다며 자신들을 불행하게 하는 학교규칙을 거부한다. 규칙으로 얽매여 있는 인간관계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켜보지만, 그럴수록 아이들의 마음은 허전하고 어둡다. “규칙이란 참 쓸쓸한 거네요.” 아이들의 감성과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교사의 감성과 상상력이 일본 어느 마을 중학생들의 꿈과 미래를 시들게 한다.(모래밭 아이들)

 

시간과 공간을 지나, 지금 여기에서 만난 세 번째 아이들의 꿈은 아련하고 삶은 고단하다. 그들의 어린시절은 불과 얼마 전이지만 기억할 수 없고, 그들이 추억하는 고향은 손에 잡힐 듯 가깝지만 갈 수 없는 나라다. 같은 조선말을 쓰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자유의 땅 대한민국에서의 정착이 더없이 부자연스럽고 위태롭다. 또래의 남한아이들은 안정된 부모와 잘 다듬어진 환경이 만들어준 봄 속에서 이유도 모른 채 꽃을 피우련만, 셋넷에서 만난 아이들은 스스로 가꾼 가난한 꽃을 통해서만 기나긴 이별과 맞바꾼 자본주의의 봄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요즘 그때 생각이 가끔 나. 26년 전 타인의 땅에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만 했던 기지촌의 아이들은 이뻤고, 쓸쓸한 교실이지만 모래밭을 딩구는 생명들처럼 싱싱했던 3학년 C반 아이들은 멋졌고, 기나긴 여정을 거쳐 통일의 그날을 맞이하려는 셋넷 아이들은 아름다웠지.’ 언젠가 그렇게, 4월에 만난 아이들을 추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