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베를린공연 후기

- 팩트체크 ‘신뢰에 대하여’

 

박상영(셋넷학교 교장)

 

 

줄곧 ‘신뢰(믿음)’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분단과 통일의 현장인 독일과 베를린을 세 번째 방문했다. 처음에는 낯선 여행자로 두리번거렸고, 작년에는 공연 연출자로 긴장했었다. 이번에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주 오래된 아픔을 지닌 분단국의 반쪽 인간의 시선으로 공연과 교류활동과 짧은 여행을 했다.

매번 습관적으로 통일을 얘기하곤 하지만 막연하고 허전한 심정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내 삶을 지탱하던 한반도는 마주치는 폭주기관차처럼 파멸로 치닫고 있다. 패배와 상실의 감정은 일상의 정서로 자리 잡고 있고 서로를 돌보지 못할 만큼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

베를린 특강에서 정진헌박사는 ‘인정’과 ‘신뢰’를 얘기했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채 갑작스럽고 우연히 이루어진 독일이 어떻게 통일을 이룰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면서 ‘믿음’을 언급했다. 1969년 서독 수상이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실시했던 동방정책(die Ostpolitik)이 그것이다. ‘동방정책’은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것을 경험한 빌리 브란트가, 동서 진영 간의 무모한 대결은 독일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구상하고 실천했던 동서독 통합정책이었다. 동독을 동등한 국가로 인정하면서 동서독 관계는 단순히 외국이 아닌 ‘특별한 관계’로 천명하고 교류와 소통을 적극 실천했다. 정권붕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긴장완화와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진솔하고 정직한 대화를 통해 구동독 주민들에게 ‘신뢰(믿음)’를 쌓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89년 11월 3일 마침내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이 되었다. 독일통일은 서독의 믿음과 신뢰를 확인한 구동독 주민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완성되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98년,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햇볕정책’을 펼쳤다.

‘햇볕정책’은 기존의 완강한 대북 흡수통일론을 배격하고 북한에 협력과 지원을 함으로써,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실시하여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목적으로 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은 2000년 3월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해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었다.

 

2003년, 노무현정부는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 발전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증진하고 남북한의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평화번영정책을 전개하였다.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어 평양을 방문하였으며, 남북 정상이 6·15 남북공동선언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확대·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하여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2008년, 이명박정부는 김대중정부·노무현정부와 달리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고 개방에 나서면 10년 안에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일방적인 ‘비핵 개방 3000구상’을 대북 노선으로 견지하였다. 북한이 이에 반발하여 남북관계는 경색되었고,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과 2차 핵실험,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폭격 사건 등이 이어지면서 남북교류는 거의 단절되었다.

 

2013년,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이 된 박근혜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정책을 천명하였다.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며, 나아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통일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박대통령은 2014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대박론’을 언급하였고, 그해 3월 28일 독일 통일의 상징 도시인 드레스덴에서 인도적 문제해결, 남북한 공동 인프라 구축, 남북 동질성 회복 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위한 3대 제안을 북한에 제시하는 ‘드레스덴 선언’을 하였다.

 

2016년 2월 10일 개성공단이 전격 폐쇄되었다.

 

‘신뢰는 믿고 의지함.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하며 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위키백과)’

한 마디로 신뢰와 믿음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단어다. 관계 속에서만 실존할 수 있고, 그 관계는 일방적인 요구나 위협이나 선언이 아니라 자발성에 근거해야만 한다.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가진 자의 선물처럼 신뢰를 하사하거나 믿음을 요구할 수 없다. 그래서 독일국민들은 무려 20년 동안 꾸준히 인내심을 갖고 신뢰를 나누며 차곡차곡 믿음을 쌓았던 것이고,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로 갑자기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누군가의 지시와 조작과 계략으로 순식간에 해치운 작전의 전리품이 결코 아니었다.

 

‘대박은 큰 배, 큰 행운이나 성공을 뜻한다.(위키백과)’

밀항선이나 화물선처럼 큰 배에 돈이 되는 진귀한 물건들을 싣고 왔을 때나 노름판에서 이겨서 큰 이익을 챙긴 사람의 돈을 ‘박’이라고도 한단다. 결국 대박은 갑작스러운 뜻밖의 경사다. 지속적으로 인내하고 정성을 들여야 하는 과정적 삶이 아니다. ‘대박’은 매주 토요일 로또복권을 품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신기루의 삶이고, 살 길을 잃어 망막해진 젊은이들이 한 끗발로 인생을 역전하려고 몸부림치는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 대박은 늘 쪽박과 이인삼각처럼 친근하다. 노름판의 한 방은 그 판에 참여한 나머지 사람들 모두를 쪽박의 그늘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대박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늘 조급하고 걸핏하면 분노한다. 대박으로 욕망을 채우려는 이들은 타협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 대박의 룰은 잃는 자와 그로부터 빼앗는 자로 선명하게 나눠진다. 대박의 승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2016년 추석 ….

오래된 간절한 믿음으로 가는 길을, 천박한 대박의 꿈으로 더럽히지 마라. 제발!

 

평화로 가는 길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

- AJ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