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오력의 배신

- 조한혜정, 엄기호 외 / 창비

 

 

삶을 재생산하는 일이 누구에게는 ‘꿈’이라고 불릴 만큼 아주 거창한 것이 되어버렸고, 필요한 비용을 오롯이 개인이 부채로 부담하고 있다.

닮고 싶은 롤모델이 없는 노답 어른, 재생산 불가능한 노답 경제 시스템, 목적 없이 사람을 소진시키는 노답 조직. ‘노답의 영겁회귀’는 ‘헬조선’의 본질로,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청년들의 운명을 상징한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가 지치고 절망한 끝에 에너지가 고갈되어 비활동 상태에 접어드는 것이 한국형 니트의 실체다. ‘잉여질 하다가 구직포기한 백수’라기보다는, ‘노오력하다가 소진되어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니트적’인 사람으로 찍히면 사회에서 배제당하기 때문에, ‘전혀 니트적이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고 다녀야 한다.

 

청년노동의 위기는 일 경험이 부족이 아니라, 나쁜 일 경험 혹은 나쁜 사회관계 경험의 과잉으로 인한 ‘피로감과 소진상태’에서 비롯. 나쁜 마음에는 좋은 마음이 아니라 ‘좋은 일’이 약이다. 숙련을 형성하고 성과를 내는 것보다 ‘마모와 소진’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냉소하는 세상을 만들어 벌레의 민주화, 즉 ‘벌레화’하여 모두가 찌질하다는 점을 드러내 같이 망하는 게 목표다. 어차피 애초에 나는 금수저가 아니었으니, 모두가 불행해져 차라리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

지금 청년들에게는 냉소와 혐오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들은 교육 과정에서 신뢰와 협동보다는 경쟁 중심의 교육에서 살아남는 법만 배웠다. 상처받기 싫다면 공격이 최선이 방어라는 것을 알기에 성가신 존재들을 차례차례 벌레로 만들어가고 있다. 청년들에게는 혐오가 유일한 힘이다. 온라인에 혐오가 존재한다면, 현실에는 차별이 있다.

 

“탈조선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더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불신하고 혐오하는 것, 아무리 ‘노오력’해도 이런 한국 사회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 이 두 가지가 현재의 탈조선을 구성하는 전제 조건이다.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탈조선은 분명한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 된다.

이저 저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심정적 난민’이 되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곧 탈조선이 지시하는 삶이다. 국민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난민의 시대가 도래해버린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전망 속에 단 한번도 들어가지 못한 채, 끊임없이 불안정한 노동으로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청년들의 삶은 ‘일상화된 난민주의’(인류학자 앤 앨리스)다.

노동을 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 산재해 있는 각종 폭력과 차별을 노골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 단순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탈진할 때까지 ‘소진’시키는 과정이다.

 

청년실업의 해법은 결국 군대문제에 걸려 있다. 냉전체제로부터 근본적 전환을 이뤄내지 않으면 신기후체제로 돌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2015년, 한국의 무기 수입은 9조원으로 세계 1위였다. 군대란 영토를 지키기 위한 살인 무기 중심의 국방이 아니라 ‘사회를 보호하는’ 후기 근대적 국방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긴급한 재난 현장에 가서 문제 해결을 하는 일부터 노인과 아기를 돌보는 일까지 포함할 것이다. 이 의무는 남자만이 아니라 남녀 모두가 공히 져야 할 의무일 것이다.

 

이 세대가 ‘대안’이란 오직 경제적 자본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믿게 되어버린 것이 문제다. 가장 큰 ‘믿을 구석’은 돈이 아닌 동료/관계라는 사회적 안전망이다. 우리사회에 만연한 적대의 총량을 줄이고 환대의 총량을 늘여갈 수 있다면 현재의 파국적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제도적 삶은 망가졌지만 삶은 지속되어야 하고,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더라도 친구와 동료를 갖고 있는 경험과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 ‘존중의 경험’과 ‘사회적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동료를 만드는 경험’이 핵심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지금, 지금은 그냥 그렇게 둘러앉아 같이 숨 쉬고 쳐다보며 살아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보면 지옥은 사라질 것이니까.